고전의향기

老子 - 임익권
글쓴이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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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周久之, (노자가) 주나라에 거주한지 오래되어,


見周之衰, 주나라가 쇠락해 가는 것을 보게 되자.


迺遂去. 마침내 주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至關, 이에 관문(함곡관 函谷關. 중원대륙과 서부을 연결하는 곳. 지금의 섬서성 삼문협에 위치하여 서안으로 이동할 때 이곳을 지나야 한다. 맹상군의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가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에 이르자


關令尹喜曰 관문을 지키건 윤희가 말하길


子將隱矣, 彊爲我著書.” "선생님 은둔하시려구요?, 저희들을 위해 책을 하나 남겨주시지요."


於是老子迺著書上下篇, 이에 노자가 상하편의 저서를 저술하게 되는데,


言道德之意五千餘言而去, 의 이야기를 담아 오천여 글자를 남기고(道德經) 떠났으니


莫知其所終. 그 후 (노자의) 종적은 아무도 모른다.


 


蓋老子百有六十餘歲, 或言二百餘歲, 以其脩道而養壽也.


무릇 노자는 160여세를 살았다 하고, 혹자는 200여세를 살았다고도 한다. 를 닦아서 양생수명(養生壽命)을 잘 했기 때문이다.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


후한시대(後漢時代. 삼국지가 시작되기 직전인 BC 202AD 220)의 도교문도(道敎門徒)들은 노자가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오랑캐 나라인 印度(인도)에 건너가 釋迦牟尼(석가모니)로 다시 태어나 오랑캐들을 가르치다 대각견성(大覺見性)하여 부처님이 되었다는 설. 한자문화권의 3대 종교였던 유(), (), ()는 상당 기간 서로 치고받았다. 특히 중국의 토착 종교였던 도교와 서쪽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가 불꽃 튀기는 진검승부를 벌인 시기는 7세기 무렵인 당()나라 때였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고, (老子)의 성이 이 씨였기에 당나라 정권에서 는 도교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도사들을 궁궐에 불러다가 도교의식을 거행하고, 도교적 명칭이 들어간 건물을 짓고, 도교경전들을 임금과 신하가 같이 봉독(奉讀)하였다.


이는 곧 불교에 대한 차별로 이어졌다. 불교를 이론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대두된 설이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다. '노자화호설'에 대항하기 위하여 불교 측에서 제시한 설은 '삼성화현설'(三聖化現說)이다. 불타가 중국으로 3인의 제자, 즉 유동보살, 광정보살, 마하가섭을 파견하여 각각 공자, 안회, 노자로 태어나게 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당나라 황실이 '삼성화현설'을 배척하고 '노자화호설' 편을 들어주었음은 물론이다.


당나라의 도교 열풍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에게도 이어졌다. 연개소문은 도교를 우대하였다. 여기에 불만을 느낀 불교 열반종(涅槃宗)의 고승인 보덕화상(普德和尙)은 고구려를 떠나 백제 땅으로 망명하였다. 현재의 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암자를 옮겨 여기에다 '비래방장'(飛來方丈)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우리 역사에서 종교 갈등으로 인하여 불교 승려가 망명을 결행한 최초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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